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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Abraxas)를 향하여> 보호의 공간 / 위험한 오브제
기간/ 2011.02.14(월) 10:00 ~ 2011.04.03(일) 17:00
장소/ 경기창작센터 지하전시실, 중앙동202호

아브락사스(Abraxas)를 향하여

 

새에게 알은 파괴해야 되는 세상이다. 이는 새가 되기 위한 필연적인 전제다. 새와 알은 불행하게도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알을 깨야 만이 새로서 세상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리디 어린 새가 알을 깨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또 그 알이 단지 깨야 되는 외부 존재나 외부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신 그 자체일 때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다. 그래야만이 새는 자신의 신인 아브락사스로 향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깨야하는 하나의 알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알들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 알은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은폐시킨 우리의 세상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알들을 깨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 알 내부에 있는 것이 얼마나 편한가도 알고 있다. 그래서 ‘꼭 새가 되어야 하나? 또는 그냥 이렇게 알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편하게 살면 안 될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이 알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 수 없음을.

 

박준식도 지금 알을 깨려고 하는 새의 상태와 같다. 그의 작품도 이러한 갈등에서 출발한다. ‘보호의 공간’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그는 그곳에 숨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도 안다. 그 어디에도 그를 보호해줄 공간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공간이 가지고 있는 가상성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위적 막을 설치하고 그 뒤로 숨는다. 그러나 완전히 숨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알의 바깥 세상에 대한 예민한 관심의 촉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맥루언(McLuhan)이 이야기했듯이, 예술가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있다. 박준식도 마찬가지다. 그는 바깥세상을 향한 예민한 촉수로 외부 세계를 탐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인위적으로 보호의 공간에 설치한 막은 투명하지고 않고 불투명하지고 않다. 보고 싶음과 보고 싶지 않음이 변증법적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박준식은 그러한 막 뒤에서 자신의 형상을 흐릿하게 드러낸다. 막 뒤의 공간에는 자신만이 있다. 그러나 막 뒤에 숨은 그는 정면을 응시한다. 비록 막 뒤에 있지만, 외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이는 타자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타자가 자신을 응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막 뒤에 있는 보호의 공간에서는 타자를 위한 공간은 없다. 그 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타자를 완전히 배제하지도 않는다. 아니, 못한다. 불투명한 막 뒤로 숨어버린 그는 자신을 완전히 숨기지도 않고, 또 온전히 드러내지도 않는다. 이러한 불안과 욕망의 충동은 구겨진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막 때문에 그의 이미지는 구겨져 있다. 마치 베이컨(Bacon)의 작품에 등장하는 형상들처럼 기괴하게 보인다.

 

그런 그가 스스로 새가 알에서 벗어나듯이 ‘보호의 공간’에서 깨어 나오려 한다. 아니 처음에는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보호의 공간 안에 외부 세계를 포섭한다. 보호의 공간 안에 있는 ‘위험한 땅’이라는 역설을 통해 그는 그의 갈등을 표출한다. 그는 비로소 그 막을 찢고 나온다. 밖으로 나온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아브락사스가 아니라, 또 다른 알인 ‘위험한 땅’이다. 외부 세계가 위험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보호의 공간’이라는 역설적인 공간이 보여주었다.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은 뭔가 위험이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알을 깨고 나온 새에게 위험한 세상이 기다고 있듯이, 보호의 공간을 찢고 나온 그를 기다리는 세상은 위험한 땅이다. 박준식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듯이 덤덤히 받아들인다. 우리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말이다. 보호의 막을 통해 안과 밖의 경계, 즉 보호의 공간이라는 가상적 틈새에 있던 그가 이제, 그 경계에서 선을 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그 공간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마치 언제 자기가 보호의 공간에 있었냐는 듯이 공간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위험한 오브제’이다.

 

그가 ‘위험한 오브제’를 통해서 위험한 공간에 개입하는 순간, 공간은 이상하게도 다른 모습을 지니기 시작한다. 위험하긴 한데, 뭔가 마술적인 작용을 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그의 ‘위험한 오브제’ 시리즈는 마치 마술적 리얼리즘처럼 작용한다. 여기가 바로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상상력이라는 게 무엇인가? 플루서(Flusser)가 정확히 이야기한 것처럼 상상력이란 세계의 사태를 하나의 장면으로 축소해서 평면에 드러내는 능력이다. 박준식의 상상력과 위험한 땅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 위험한 오브제다.

 

이 만나는 지점을 그는 마술적 리얼리즘처럼 보여준다. 이 시리즈는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이 사실 매우 위험한 공간이라는 것을 강조하듯이 보여준다. 그런데 섬뜩하기 보다는 환영적이며, 또 때로는 초현실적이다. 그래서 그의 이 시리즈는 마치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rica)의 <집시의 시간>이라는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이 영화에서는 집시의 고단하고 고통스럽고 희망 없는 삶을 마술적 리얼리즘적 기법으로 보여준다. 박준식의 위험한 오브제는 물고기 같기도 하고, 폭탄 같기도 하다. 또 이 ‘위험한 오브제’는 너무 일상적이어서 상상할 수 없는 장소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이 상황은 매우 비극적인데, 그는 담담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그러낸다. 그래서 이 ‘위험한 오브제’가 만들어내는 상황을 응시하고 있으면, 귓가에 흥겨운 집시풍의 음악이 흐르는 것과 같은 공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란 일종의 집시일 수 있다. 즉, 자유롭지만 힘든 상황에서 주술적인 힘, 상황을 희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집시와 같다. 이러한 힘을 가지고 사회에 예술적으로 개입하는 예술가는 집시다.

 

어쨌든 박준식은 알에서 깨어 나와, 사회 그리고 타자와 서로 교감을 나누려고 한다. 그리고 이 교감의 장에 기꺼이 타자들을 불러들인다. 혼자만이 아브락사스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브락사스로 향하자고 말이다. 물론 그가 보호의 공간에서 벗어나, 위험한 땅을 직시하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아브락사스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알을 깨고 나와야 아브락사스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을.

 

심 혜련(전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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